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르틴 루터 (문단 편집) == 기타 == [include(틀:토론 합의, this=기타, 토론주소1=AncientTightfistedEndurableBird, 합의사항1=서술을 간소화하기)] * [[경기도]] [[용인시]]에 있는 [[루터대학교]]는 이 사람의 이름을 딴 것이다. * 미국의 유명한 사회운동가이자 [[목사]]였던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역시 이 사람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이다. * 루터는 자신이 번역한 신약성경 초판에서 [[야고보서]]가 복음의 본질이 없다며 지푸라기 서신이라고 평한 적 있다. 그리하여 독일어 성서 초판본에는 야고보서를 빼려고 했으나 "그런 짓은 이단들이나 하는 것"이라는 멜란히톤과 동료 신학자들의 거센 비판을 받아들였다. 그 후 재판에서는 기존의 평가를 삭제하였고 다른 곳에서는 야고보서가 하나님의 율법을 힘 있게 전한다며 자신은 야고보서를 찬양한다고 말하였다고 한다. * 루터가 [[마녀사냥]]에 대해서는 적극 지지했다는 비난이 있는데 사실무근. 한때 루터가 마녀드립을 친 건 사실이지만 루터는 전통적인 마법이나 마녀 자체엔 별 관심이 없고 악마숭배와 우상숭배 근절에 관심이 있었다.[* 《유럽의 마녀사냥》 브라이언 P. 르박(Brian P. Levack)著, 한편 칼뱅의 경우는 루터보다 마녀 언급이 더 적었다.] 루터는 마녀뿐만 아니라 종교적 이유를 들어 누구의 처형을 주장한 적이 없다. 루터가 새로운 교회를 설립하고 나선 20여년 동안 마녀사냥이나 종교 재판이 없었다. 그리고 비텐베르크에서 첫 마녀사냥이 있던 것은 1540년이다.[* : ≪마르틴 루터≫ -파울 슈레켄바흐(Paul Schreckenbach), 프란츠 노이베르트(Franz Neubert) 공저- 참조 바람. 1540년 첫 마녀사냥이라 분명히 나옴.] 루터는 결코 열성적인 마녀 사냥꾼이 아니었다. [[출애굽기]]의 "무당과 점치는 자, 어린이에게 마술을 거는 자를 살려두지 마라"는 구절을 근거로 반대하지 않았을 뿐이다. *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에 대해 '''"그 바보가 [[천문학]]을 송두리째 망쳐놓을 거다"'''고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당시 루터는 "성경에서 하나님이 [[여호수아]]보고 멈추라 명한 건 [[태양]]이지 [[지구]]가 아니다."라고 말했다는데, 루터 자신의 저서에 등장하는 말이 아니라 그의 언행을 모은 《탁상담화》라는 책에만 등장하기 때문에 루터가 이런 말을 진짜로 했는지는 불명.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을 발표한 것은 1543년이고 루터는 1546년에 사망하니 시기는 일치할 수 있겠지만, '''그 당시 학계에서도 [[천동설]]은 통설이었고, 당연히 코페르니쿠스의 저작은 발표당시 동시대 지식인에게 조차 인정받지 못 했다.''' 400여부만 초판을 찍었는데 다 팔리지도 않았다. 그리고 오랜 세월 동안 유럽 천문학의 핵심 [[패러다임]]이었으며 실제로도 당시 다양한 천체의 운동을 (좀 복잡하지만) 설명할 수 있었고 데이터의 축적도 풍부한 편이었다. 그러니 저 발언이 실제 루터의 것이라고 해도, 오늘날 사람들이 지동설을 비판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발언이라고까지 생각해서는 곤란하다. 당시 루터는 나이가 60살이 넘었고, 젊은 시절 받은 교육도 대학에서 문학과 법학을 공부하고 뒤이어 신학박사가 된 전형적인 [[문과]]이다. 본인 왈 "나는 아내 카테리나 폰 보라보다 산수를 못 한다"고 고백할 정도였다. 다만 루터시기 중세와 르네상스 시절 대학에선 초급 과정에서 교양을 필수로 배워야 했는데, 라틴어 문법, 수사학, 웅변술을 기초로 하여 시, 문학, 음악, 천문학, 기하학, 대수학, 지리학 등을 필수로 이수해야만 고급과정인 신학, 법학, 의학과정이 지원이 가능했다. 그러니까 당시 대학 졸업자들은 그 당시 학계 통설을 기본 수준 이상 배운 교양인이라는 것. 루터가 다닌 에어푸르트 대학은 하이델베르크와 쾰른에 이어 독일에서 3번째로 설립된 명문학교였다. * [[면죄부]]와 [[성인(기독교)|성인]] 공경, [[성유물]] 숭배뿐만 아니라 [[성지순례]]도 쓸데없는 짓이라고 반대했다. 가장이 성지에 가는 것보다 가족을 부양하는 것이 더 고귀하고 가치 있는 일이라고 신자들에게 당부했다. 면죄부에 대해서는 당연(?)히 쓸모없다 비판했는데 "가난한 이는 면죄부보다 집을 먼저 사라!"고 했고 부유한 이는 그 돈으로 빈민에게 기부하라고 했다. * [[이슬람교]]에 대한 태도로는, 당시 거대한 세력을 자랑하던 [[오스만 튀르크]] 제국에 대해서는 [[아틸라]]를 바라보는 기독교도들의 시선마냥 "주님께서 이슬람을 허락하신 것은 우리를 회개케 하기 위함이다"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징벌'이라는 태도를 보였지만, 이슬람 교리에 대해선 "무슬림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유업에 대한 파괴자요, 적으로서 복음 대신 무함마드와 온갖 거짓을 세우며 정부와 가정생활을 파괴하는 자들이다"라고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고. 한편으론 [[무함마드]]에 관심이 많아서 [[쿠란]] 번역을 후원했다. 1543년 바젤에서 쿠란 번역본이 출판되었다. * [[가톨릭]]교회를 박차고 나와 활동하던 중 주변 인물이 "거 [[수녀]]들은 평소에 무슨 고해를 합디까?"라고 묻자 벼락같은 불호령을 작렬시켰다는 일화를 가지고 있다. [[고해성사]] 항목을 참조. 고해성사 일화는 출처는 불분명하다. 루터는 수사신부였고 수도생활을 했기 때문에 수도원 밖에서 여성을 만나는 일 자체가 드물었고, 사제가 된 뒤에도 교회가 아니라 비텐베르크 대학 신학 교수로 출강했다. 그리고 [[수도자]] 시절 계율상 여성과의 대화는 중죄에 해당하는데다가 자신의 증언으로도 사제 시절 의식적으로 여성의 고해성사는 되도록이면 피했고, 얼굴을 돌려서 응답했고, 금방 잊으려했다고 훗날 회고했다. 로마와 절연하고도 동료 신학자나 개혁가들에게 고해를 받거나 고해를 해주긴 했는데 고해는 고해에서 그칠 뿐. 고해성사는 교회에서 만든 인위적인 제도로 폐지를 주장했다. * [[프로이센 왕국]]의 등장에 혁혁한 공을 세운 사람이다. 1525년 [[튜튼 기사단]]의 37대 기사단장 알브레히트 폰 호엔촐레른이 신교로 개종하여 기사단의 영지를 세속화한 것이 [[프로이센 공국]]의 시초이기 때문이다. 기사단장 [[알브레히트(프로이센)|알브레히트]]는 [[폴란드 왕국]]과의 전쟁에서 자신들을 돕지 않는 신성 로마 제국의 태도에 실망한 와중에 [[뉘른베르크]]에서 열린 신교도들의 회의에 참석하여 신교와 처음 접하였고 곧이어 [[비텐베르크]]를 방문해 루터를 이야기를 나누고 난 후 지속적으로 서신 교환을 했다. 루터의 설득에 알브레히트는 신교로 개종, 기사단장직을 반납한 뒤 [[독일 기사단국]]을 세속화하였고 세속화에 따르지 않는 가톨릭 성향 기사들을 내쫓은 후 종주국 폴란드 국왕인 [[지그문트 1세]]로부터 세속화를 승인 받아 프로이센 공작이 되었다. 사실 처음에 지그문트 1세는 알브레히트가 자신의 외조카였음에도 프로이센 공작 부임을 반대했는데 이런 지그문트 1세를 설득시킨 것도 바로 루터였다. 여담으로 알브레히트 폰 호엔촐레른의 가문은 훗날의 프로이센 왕실이 되는 [[호엔촐레른 가문]]의 직계가 아니고 남독일 [[안스바흐]]를 다스리던 호엔촐레른-안스바흐 가문인 분가 출신으로 호엔촐레른 가문의 직계는 프로이센 공국이 아닌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을 다스리던 가문이다. 왜냐하면 1618년 프로이센 공국의 대가 끊겨서 프로이센 공국을 맏사위이자 가장 가까운 친척이었던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요한 지기스문트]]가 물려받았기 때문이다. 호엔촐레른 가문의 직계가 프로이센 공국을 취득하고 훗날 왕국을 세울 때에도 [[신성 로마 제국]] 밖의 영토인[* [[신성 로마 제국]]에선 황제의 후계자인 [[로마왕]], 그리고 선제후인 보헤미아 왕, 딱 2명만 국왕 칭호를 사용했다.] 프로이센을 왕국명으로 썼을 뿐 왕국을 주도적으로 이끈 건 브란덴부르크였으며 수도도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의 수도인 [[베를린]]이었다. 브란덴부르크 선제후는 1613년 칼뱅파로 개종했기 때문에 프로이센 왕실은 칼뱅파가 되었으나, 율리히-클레베-베르크 분쟁에서 네덜란드의 지원을 얻을 목적으로 개종한 것이라 신앙심이 딱히 투철하지 않았고, 신민들과 주요 귀족 대부분은 루터파를 계속 믿었다. 1817년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부터는 루터파와 칼뱅파의 교리를 섞은 프로이센 통합 교회를 믿기 시작했다. * [[멘델스존]]의 교향곡 5번 종교개혁은 루터파 교리에 해당하는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이 공인된 지 300주년을 기념한 것이다. * 프랑스의 19세기 문학가 스탕달의 작품 ≪[[적과 흑]]≫에서 주인공 소렐은 공부를 잘해서 가톨릭 신학교 동급생들에게 왕따를 당하는데, 별명이 마르틴 루터였다. 그를 아껴주는 스승도 얀센주의자라고 까였는데, 알다시피 얀센주의와 루터파는 나란히 가톨릭교회서 이단 선고를 받은 데서 비꼰 것이다. * [[나치 독일]]의 외교관이자 이름만 같은 사람인 [[https://en.wikipedia.org/wiki/Martin_Luther_(diplomat)|마르틴 루터]](1895~1945)가 있다. 이 루터는 [[반제 회의]]에 참석했으며, 대체역사소설 [[당신들의 조국]]에서 주요 인물로 등장한다. * [[흑사병]]과 관련해 편지를 쓴 바 있다. [[영미권]]에서는 이 편지가 [[코로나 19]]로 인한 교회의 예배 중단 문제 때문에 꽤나 유명세를 탔었다. [[https://blogs.lcms.org/wp-content/uploads/2020/03/Plague-blogLW.pdf|원문]] [[https://www.evernote.com/shard/s331/sh/aa2ae653-6217-edb4-6592-15b7ad709ab9/8587c412caf90201db153e998edb963b|번역본]] * 의외로 자살한 사람들에 대해서 함부로 지옥에 간다고 단정짓지 말아야 한다는 의견을 남겼다. * 통상적으로는 '중세 후기가 타락의 정점을 찍어서 루터가 출현했다'라는 단순한 이해가 많지만, 이는 루터의 의도에도 학계의 중세 평가에도 부합하지 않는다. 먼저 루터의 의도를 짚고 넘어가자면, 루터에 열광한 독일 내 추종자들이 성직자들의 축재와 성적 문란, 수도원 타락, 성직매매, 그로 인해 비롯되는 수준 이하의 성직자, 면벌부 판매와 제후-주교들의 과세[* 『독일에 중앙집권적 통제력이 공백이었다는 사실은 독일에서 교황들이 교회 직위를 임명하는 힘, 그리고 제후-주교들을 통해 서민층에게서 세금을 거두어들이는 힘(언제나 울분의 비옥한 원천이었다)이 더 강했음을 뜻한다.』 {{{-2 (Peter Marshall. 2017. 《종교개혁》 [[https://ridibooks.com/books/3945000070?_s=search&_q=종교개혁|{{{[}}}ebook{{{]}}}]]. 이재만 옮김. 파주: 교유서가)}}}] 등을 맹비난한 것과 달리, 루터는 신학적인 면을 제외하면 그런 문제는 부차적인 것으로 여겨 별 관심이 없었다. 훗날 종교개혁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사건에 대해 신학자이며 수도자인 루터의 견해에 의하면 면벌부 자체가 교회타락의 원인이 아니며 중세신학이 교회를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었기 때문에 면죄부는 그 부작용의 한 가지 예일 뿐이었다. 루터가 오히려 부작용만을 비판했다면 종교개혁은 없었을 것이다. 둘째로 학계의 중세 평가를 언급하자면, 오늘날 학계는 중세 후기의 그리스도인들이 타락의 정점을 찍었다는 관점에 동의하지 않는다.[* 『Traditional religion had about it no particular marks of exhaustion or decay, and indeed in a whole host of ways, from the multiplication of vernacular religious books to adaptations within the national and regional cult of the saints, was showing itself well able to meet new needs and new conditions.(전통적 믿음은 쇠퇴했다거나 부패했다는 흔적은 없으며, 정녕 모든 경로에서, 토착어 신심 서적들의 증가에서부터 국가적, 지역적 성인 공경에 이르기까지, 전통적 믿음은 새로운 수요들과 상태들을 충족시킬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2 (Eamon Duffy. 2005. 《The Stripping of the Altars: Traditional Religion in England c.1400c.1580》 [[https://www.amazon.com/-/ko/gp/aw/d/B00IUMZDNO/ref=tmm_kin_swatch_0?ie=UTF8&qid=1622283747&sr=8-1|{{{[}}}ebook{{{]}}}]]. 2판. New Haven & London : Yale University Press)}}}; 『Eamon Duffy shows that late medieval Catholicism was neither decadent nor decayed, but was a strong and vigorous tradition, and that the Reformation represented a violent rupture from a popular and theologically respectable religious system.』 {{{-2 (같은 책 Yale University Press [[https://yalebooks.yale.edu/book/9780300108286/stripping-altars|책 소개]])}}}] 분명히 중세 후기에 일련의 문제점들이 있었고 독일에서 일종의 반교권적 분개가 있았지만, 그것이 이전 시기와 비교되었을 때 상대적으로 더 타락한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하급 성직자 영역에서는 중세 말엽의 전형적 현상인 "성직자 프롤레타리아"가 나타났다. 도시들 가운데는 [[사제]]와 [[수도자]]가 전체 주민의 10분의 1에 이르는 곳도 있었다. 그중 대부분은 물질적으로뿐 아니라 정신적 · 영적으로도 극히 수준이 낮았다. 중세 때의 일반적인 시골 신부 또는 도시의 평범한 "[[교구]] 소속 신부"는 처지가 가련했고 교육도 거의 받지 못했다. 사제가 된 사람은 대개 한 사목자에게 "견습하러 가서"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들을 배웠다. 대학에서의 신학 교육은 대개 [[수도회]] 소속 사제들만 받았는데, 그것도 항상 그런 것은 결코 아니었다. 게다가 도시의 매우 많은 사제들이 신자들의 영혼을 보살피는 사목 사제가 아니라 "[[미사]] 집전 사제"였던바, 이들의 물질적 기반은 미사 예물과 그것에 관련된 부과금이었다. 독신제의 준수는 이 성직자 프롤레타리아의 대부분에게 문제 밖의 일이었음이 확실하다. 독신제가 실제로 어느 정도나 준수되었는지는 확실히 말하기가 어렵다. 나라마다 사정이 매우 달랐다. 15세기 독일(쾰른 또는 콘스탄츠)의 시찰 보고서들에 의하면 교구 사제의 3분의 1이 내연관계를 맺고 있었다. 정확한 통계는 나와 있지 않지만 그 정도만 해도 비교적 양호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아무튼 이 문제에서 그리고 민중들의 종교생활에서는 더더욱, 중세 말과 종교개혁 직전의 상황이 이른바 건전한 중세 전성기 때보다 나빴다고 생각해서는 결코 안 된다. 사실은 그 반대였다. 1500년 전후의 시기는 특히 독일에서 그 이전 어느 시대보다 "경건"했고 신앙이 뜨거웠다. 그러나 바로 그런 시기에 이상과 현실 사이, 종교적 이상과 당시의 사회 현실을 반영한 교회구조들 사이의 괴리는 더욱 터무니없게 느껴졌다. 그러므로 당시 개혁에의 외침은 전반적인 쇠락의 증거가 아니라 종교적 활력의 증거였다.』{{{-2 (Klaus Schatz. 2005. 《보편공의회사》. 이종한 옮김. 왜관: [[분도출판사]]. 212-213.)}}}][* 『반성직자주의성직자가 누린 정치권력에 대한 반감와 교회의 가르침에 대한 거부가 동일한 것은 아니다. 모든 증거는 16세기 초에 독일이 경건한 정통 가톨릭 사회였음을 가리킨다. 그러나 독일은 민족적·반교권적 분개로 가득했고, 그 분개는 루터의 목소리로 표출되었다.』 {{{-2 (Peter Marshall. 2017. 《종교개혁》 [[https://ridibooks.com/books/3945000070?_s=search&_q=종교개혁|{{{[}}}ebook{{{]}}}]]. 이재만 옮김. 파주: 교유서가)}}}]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